오래된 현대무술, 소림권

정식 명칭
소림쿵후, 소림무술, 소림권
 유  래
복합적
창 시 자
미상
발 원 지
중국
핵심인물
유대유, 정종유, 김은충
주  소
격투기>중국>중국무술
특  징 
#격투기 #무술 #혼합적 #근대무술 #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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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권은 중국 전통 권종 중 하나이다. 중국 무술 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유파로서, 강건하고 힘차며, 소박하고 꾸밈없는 기술로 국내외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역사와 발전

aed83885 14ef 4bb4 a28c cb5d62b10ad9소림사는 하남성 등봉현에 있다. 북위 효문제(471-499년) 19년(혹은 20년)에 건설되었다. 소림권의 원류에 관하여 1919년에 출판된 『중국 체육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달마가 창안한 십팔나한수는 바로 후대의 소림권의 남상이다.” 1930년 출간된 『소림무당고』에는 몇 가지 고증 끝에 소림무술 달마 창안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림사 경내 비석에는 621년 봄 소림사의 승려들이 경쟁자인 왕세충과 싸우던 당태종 이세민을 도왔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전투를 한 것은 확실한데 체계적인 기술과 교습이 행해졌다는 기록은 없다. 소림사 승려들의 전투에 관한 내용은 당나라 때뿐이다.

소림사를 방문했던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 가운데 소림사에서 무술 수련을 하였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뒤이은 송대와 원대의 학자들 역시 소림사에서 무술을 수련하였다고 언급하지 않았다.

소림사 무술의 증거는 명나라 후기에 들어 제법 나타난다. 16~17세기 글들에는 소림사의 창술과 권술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소림사의 승려들이 곤법에 뛰어났다는 내용도 있다.

명대의 소림무술

『검경』의 저자 유대유는 1560년경 소림무술을 살펴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소림무술은 크게 쇠퇴하여 있었다. 그는 오히려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그의 무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하지만 정종유가 『소림권법천종』을 지은 것은 1616년이고, 그가 유대유가 방문한 지 15년이 지난 후 소림사에서 배운 곤술은 유대유의 검경에 등장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대유가 가르친 곤법과 정종유가 배운 곤법은 명칭에서부터 가결과 삽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서로 다르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소림사의 무술은 극적으로 발전을 한다. 사회적 환경이 무술가들의 존재를 필요로 한 것이다. 명대 후반의 사람들이 소림사 무술에 관심을 기울인 한가지 이유는 정규군의 쇠퇴였다. 몇몇 군사전문가들은 정부가 승군을 정규군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무승들은 16세기 중국 동남해안의 왜구들과의 전투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소림사의 정식 승려가 아닌 떠돌이 무사나 무뢰한들이 소림사 승려를 흉내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이 실제 소림사 출신 승려인지는 불확실하다. 소림사 승려가 전투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당나라 왕세충의 난 당시 이세민을 도왔다는 것이 그나마 신뢰성 있는 정보이다. 

소림사

소림사가 무공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명말 청초이다. 소림사의 정식 승려들이 전투에 참여했다기 보다는 무술에 대한 소림사의 명성에 의지한 군인이나 민간인이 들어났다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명나라 가정 연간(1522-1566년), 왜구가 중국 동남해안을 침범하였다. 월공月空등 소림무승 80여 명이 전쟁에 나가 적들의 기세를 꺾었고, 30여 명이 차례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오송갑을왜변지吳淞甲乙倭變志』에 따르면 소림무승은 길이 7척, 무게 30근의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소림사의 무술이 발전한 이유는 지리적 위치로 소림사의 위치가 하남성 중앙이었다는 점이다. 궁핍과 폭력은 하남성에서 무술 수련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부분적으로 명대 후기의 무술은 지역적인 영향을 받았음에 확실하다.

사회가 혼란해야 무술이 발전한다. 이 명제는 명말 청초(16세기-17세기)를 무술의 황금기로 만들었고 20세기 초반(1910년-1930년)을 역시 두 번째 무술의 전성기로 만들었다. 두 번째 무술의 전성기에는 -거의 새로 만들어지다시피 했지만- 무술의 전승을 소림사와 더 고대로 잡은 것이다.

소림권과 달마대사가 연관된 것은 1919년에 출판된 『중국 체육사』에서 언급한 것이 최초이다. 그 이전에는 달마대사와 무술이 전혀 상관이 없었고 이것 또한 20세기 초반 위조된 소림사의 전설 중의 하나이다.

소림권은 근현대에서 발전하였는데, 선권일체禪拳一體,신형일편神形一片, 경타쾌공硬打快攻,제진제퇴齊進齊退 등 소림권의 특징은 근대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즉 현대의 소림권은 근대에 새롭게 탄생한 것이지 명말의 소림권이 그대로 전승된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 중국인들은 민족주의와 자강의 하나로 무술 수련을 강조하였고 고문헌을 연구하며 무술을 복원하고 있었다.

소림사무승002소림권의 투로에는, 소홍권小紅拳, 대홍권大紅拳. 노홍권老紅拳, 나한권羅漢拳, 소양권昭陽拳매화권梅花拳, 포권炮拳, 칠성권七星拳, 유권柔拳 등이 있으며 기타 무기술이 있다. 소림심의파는 소림사의 비전이 아니라 낙양 인근에서 전승되던 심의권이 소림사로 들어간 것이다.

소림권의 주요 투로는 소림사만의 정체성이 보이지 않고, 북파 장권의 무술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북파 장권이란 북경 등지에서 행해지던 표연 위주의 사권(査拳), 홍권(洪拳), 화권(華拳) 등을 말하는 것이고 경극 같은 영화 무술의 한 부류로 성장한 것이다. 중국 무술의 특징은 연극처럼 행해지는 표연이고 이것은 무대와 관중을 전제로 한 것이다.

소림무술의 정체성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등봉현 근처의 마을들이다. 소림사에서 멀지 않은 진가구의 태극권은 연무의 풍격은 다르지만 태극권의 원류인 두투권 13세 등을 추리해보면 청나라 시기 민간무술의 모습을 더 잘 유추할 수 있다.

소림 무술이 달마대사 창시설을 만들어냈고 달마대사는 외국인 출신이다. 이 설화에 대항하기 위해 장삼봉 태극권 창시설이 나왔는데 장삼봉은 중국인이다. 소림 무술은 외래에서 전래한 외가권, 태극권은 중국 국내에서  만든 내가권이라는, 향후 100여년간 무술에 대한 잘못된 분류와 인식을 초래한 외가권 대 내가권의 대립구도가 만들어 졌다. 

소림사는 1980년 영화 『소림사』가 나오고부터 소림무술의 명말청초와 20세기 초반을 잇는 3번째 전성기를 맞게 된다. 정부에서는 관광자원으로서 소림사에 주목하고 권술과 무기술을 발굴하고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소림사의 모든 신화와 전설들이 받아들여졌으며 사실로 둔갑하였다.

현재 소림무술은 주변의 무술학교에서 배울 수 있고 소림사 경내에는 무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다. 소림사 주변의 무술학교들의 교장은 정식 승려라는 소림사 출신 승려들이 맡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어떤 경로로 소림사에서 출가하였고 어떤 교육 과정을 밟았는지는 불확실하다. 

소림사는 달마 대사가 창립한 이후 선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지만 선불교의 전통은 중국에서 끊어진지 오래이다. 선불교는 법통을 중시하여 스승이 제자에게 인가를 하는 전통과 족보가 중요하다. 현재 소림사의 선불교의 맥과 전수 경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무술은 고대부터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따라 만들어지고 복원되며 재구성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소림권의 모습은 20세기 초반의 것이며 소림사의 무술 투로들은 1980년대 북파 장권의 영향 하에서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현대에 전해진 것은 기술이 아니라 문서 기록과 명칭뿐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서와 책을 보고 연구하고 만들었으며 기원을 가탁한 것이다.
내가권, 내가권법
팔괘장
내공
현대 중국의 무술들은 거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재구성된 현대무술이다. 지금도 옛 문헌을 보고 고대 무술에는 뭔가 심오한 진전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무술을 복원하려는 시도들이 있는데 이미 20세기 초반에 조상들이 다 해 놓아서 지금 보고 있는 중국 무술들이 바로 그 모습이다.

소림권의 부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34년 출간된 김은충(金恩忠)의 『소림칠십이예』이다. 20세기 무술 수련의 내용을 잘 전해주고 있는 명저이다. 이 책에 수록된 72가지 단련법은 무협지적인 명칭과는 다르게 현대 기능성 트레이닝과 별반 다르지 않고 신비한 내용이 없다. 오공도(蜈蚣跳)는 점핑푸시업이며 수수술(泅水術)은 수영이다. 합마공(蛤蟆功)은 역기 드는 것이고 비행공(飛行功)은 장거리 달리기이다.

『소림칠십이예』의 저자 김은충은 독립운동가 김은충과 행적이 겹친다. (아직 확실치는 않고 연구가 더 필요한 사항) 김은충은 경주 출신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백범 김구 밑에서 비서 역할을 했다. 김은충의 말년 행적은 뚜렷한 기록이 없지만 외손자가 중국에 살고 있고 해방 전후에 중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친 것 같다.

중국 바이두 백과에는 김은충을 중국사람으로 적어놓았지만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김은충의 무술 경력은 북경에서 육합권과 담퇴, 신타神打(삼황성공권三皇性功拳)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소림사 방장 묘흥대사에게 소림72예少林七十二藝를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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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충의 사진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 김은충은 베이징에서 육영毓英중학교를 졸업했다.
  2. 1923년 동북삼성으로 가서 종군했다.
  3. 1925년 진위군 제6사단 소대장이 되었다.
  4. 1928년 군관훈련소를 졸업하고 예비군 대대장을 역임했다. 그해 소림사에 불이 났다. 같은 해 중앙국술관 시험에 응시하였고, 1929년  동북방위군의 무술 교련이 되었다.
  5. 1931년 9월 18일 사건 이후 천진공안국에서 보안총대 부관으로 일했고 무술책을 쓰기 시작했다.

『소림72예少林七十二藝』, 『실용대도술實用大刀術』, 『국술명인록國術名人錄』의 저자 김은충이 독립운동가 김은충이라면 근대 소림무술의 부흥은 김은충에게 덕을 많이 지고 있는 것이며 김은충은 근래 100여년 간 가장 뛰어나고 성공한 무술 덕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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